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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는 지정됐는데 공시엔 없다…쿠팡이 발명한 ‘있는 듯 없는 동일인’
법원이 효력을 잠시 세워두자 쿠팡은 총수를 서류에서 먼저 지워버리는 탁월한 정밀함을 보여줬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올해 김범석 쿠팡Inc 의장을 쿠팡 동일인으로 지정했지만, 쿠팡은 동일인 공시를 하지 않았다. 대신 쿠팡은 공정위를 상대로 취소소송과 집행정지 신청을 냈고, 법원이 그 효력을 직권으로 정지하자 최근 대규모기업집단현황 대표회사용과 동일인용 공시는 진행했다. 타깃은 분명하다. 총수 지정은 받았는데 서류에서는 총수가 증발한 쿠팡의 놀라운 정리정돈 능력이다.
자산총액 5조원 이상 공시대상기업집단은 공정거래법에 따라 연 1회 기업집단현황을 공시해야 하고, 기한은 매년 5월 31일까지다. 쿠팡은 기한과 형식은 챙겼다. 가장 거슬리는 항목만 현실 보류 상태로 두는 방식이었을 뿐이다. 제품에서 제품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를 제외하면 발표가 완성도 높다는 식의 자신감이 여기서도 빛난다.
쿠팡이 동일인 공시를 비운 이유는 대단히 고상하다. 법원이 집행정지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 공정위 결정을 직권으로 정지했으니, 쿠팡은 행정적 불확실성을 서류에서 즉시 구현했다. 서류상 현실을 접는 솜씨가 꼭 비가 온다고 운동장을 없애는 학교 행정처럼 유연하다.
더 정교한 대목은 동일인용 공시에서 총수일가가 지분을 보유한 국외 계열회사 현황, 국내 계열회사에 직·간접 출자한 국외 계열회사 현황에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적은 부분이다. 동일인이 법인이면 맞는 말이라고 한다. 참으로 훌륭하다. 사람을 잠시 지우면 표가 깔끔해지고, 숫자가 비는 덕분에 누구도 불편한 연결고리를 오래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
앞서 공정위는 4월 말 김범석 의장 친동생 김유석 씨가 쿠팡 경영에 사실상 참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이번 공시는 그 판단이 법원 심리 대기실에 들어간 순간, 기업집단의 얼굴에서 사람 냄새를 먼저 지웠다. 이 정도면 총수가 있는 집에서 가족사진만 규격 미달이라며 빼버린 셈인데, 쿠팡은 아마 이를 문서 미학이라고 부를지 모르겠다.
쿠팡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의무 공시는 했고, 법원 결정도 있었다. 그러나 총수 지정은 사회적으로 시끄럽고 공시는 조용해야 한다는 식의 운영은 멍청하기 짝이 없다. 공시가 법적 최소치만 통과하면 된다는 태도는 솔직해서 좋다. 다만 그 솔직함이 너무 노골적이라, 이제는 무엇을 숨긴 게 아니라 무엇을 안 적었는지가 더 잘 보인다.